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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사랑

제목
이야기를 파는 장사꾼, 전기수
작성일
2015-02-11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13917

서울역사박물관 3층에 가면 한양 최고의 번화가였던 운종가의 모습을 재현해놓은 대형 미니어처를 볼 수 있다. 버튼을 누르면 조명이 커지면서 당시 어떤 사람들이 있었고, 무슨 일을 했는지 이런 저런 설명들을 들려주는데, 그중에는 전기수傳奇에 관한 설명도 포함되어 있다. 갓을 쓰고 의자에 앉은 전기수 주변에 구경꾼이 몇 명 모여서 얘기를 듣는 풍경을 재현해놓은 것이다.

 

01. 02『. 옥중화』와『장끼전』. 일제강점기에는이러한책들을가지고다니며이야기를팔던이야기장사가 꽤 되었다고 한다. ⓒ한국만화자료원

 

이야기를 들려주다

사실 사람들이 지금처럼 영화나 드라마, 인터넷 같은 것들을 통해서 이야기를 소비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한 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이전에는 오직 배우들의 연기와 책을 통해서 이야기를 소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 난하고 돈 없는 서민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그나마 책이 접하기 쉬웠지만 지금처럼 인쇄술이 발달하기 이전의 책은 상당한 고가품이었다. 거기다 책을 읽을 수 있는 문자 해독률이 낮았던 점도 방해요소였다. 이런 한계들을 뛰어넘게 해준 것이 바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전기수였다. 전기수의 입을 통해서 이야기를 들으니까 문자를 몰라도 상관 없었고, 책이 라는 비싼 고가품을 따로 구입할 이유가 없었다.

전기수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8세기 들어서였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사회가 안정되면서 중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여항문화閭巷文化가 본격적으로 꽃을 피운다. 시와 그림같이 양반들의 전유물로 생각되던 문화들이 중인들을 거쳐서 서민들에게까지 전파된 것이다. 그러면서 서민들을 위한 이야기꾼인 전기수가 등장하게 된다. 조선 영조 때의 시인인 조수삼(趙秀三, 1762~1849)이 쓴『추재기이秋齋紀異』에는 매일 한양의 번화가를 옮겨 다니면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전기수의 얘기가 등장한다. 전기수들은 주로『삼국지』나『수호지』같은 중국의 고전들과『임경업전林慶業傳』같은 영웅소설부터『운영전』같은 애정소설까지 다양한 소설의 내용을 들려줬는데, 단순히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실린 채로 일종의 연기를 했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길을 가던 사람들의 발걸음이 멈췄는데, 어찌나 호소력이 짙었는지 심지어는『임경업전』을 듣던 구경꾼이 전기수가 간신 김자점의 모함으로 임경업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들려주자 흥분한 나머지 담배 써는 칼로 난자해서 죽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듣는 사람이 현실과 이야기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전기수들의 솜씨가 뛰어났다는 반증일 것이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가 뛰어난 전기수들은 많은 인기를 누렸는데, 그러면서 많은 얘깃거리들을 남겼다. 이업복이라는 유명한 전기수는그의 얘기를 듣고 감동한 어느 부자의 양아들로 들어갔다. 10년 동안 이야기를 들려주고 모은 돈으로 집을 산 김호주라는 전기수도 있었다. 개중에는 여장을 하고 사대부 집안의 안채에 드나들면서 부인들에게 얘기를 들려주던 전기수도 있었다고 한다. 남녀의 구분이 엄격하던 시대, 특히 외간 남자는 드나들 수 없었던 사대부 집안의 안채까지 들어갈 정도로 전기수의 인기는 대단했다.

담배가게에서 담뱃잎을 다듬고 써는 일을 하면서 이야기꾼이 읽어 주는 소설을 듣고있다. ⓒ국립중앙박물관 05『. 청구야담』. 조선 후기에 편찬된 편자 미상의 야담집으로, 전기수 중 가장 유명한 인물로 꼽히는 이업복에 대한 소개가 나와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야기는 불온하다

조선시대에 이야기는 불온한 것으로 취급받았다. 글공부를 해야 할 선비나 바른 마음을 가져야 할 여염집 아낙네가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쓸데없는 이야기에 빠져들면 나라의 기강이 무너진다는 논리였다. 개혁군주로 잘 알려진 정조는 선비들의 문체가 바르지 못하다면서 검열을 해서 반성문을 바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에 전기수 역시 탄압과 손가락질을 받았다. 사대부 집안의 안채에 드나들던 전기수는 문란하다는 죄목으로 포도청에 끌려가서 죽음을 당했다. 이업복도 자신을 양자로 들인 부부의 딸을 겁탈했다는 소문에 시달렸다. 하지만 서민들은 책과 문자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주는 전기수에 열광했다. 그렇게 전기수는 지배층에게는 의심과 탄압을, 서민들에게는 열렬한 사랑을 받으면서 시대를 풍미했다.

 

이야기는 영원하다

그렇다면 입장료를 받을 수 없는 전기수들은 어떤 방식으로 생계를 유지했을까? 전기수들은 한참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클라이맥스 부분에 이르기 직전에 마치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고 한다. 그러면 다음 얘기가 궁금해진 구경꾼들이 다투어 주머니를 털어서 돈을 던졌다. 돈이 만족할 만큼 모이면 전기수는 빙그레 웃으면서 뒷얘기를 술술 들려주었다. 이 방식을 요전법邀錢法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서 돈을 꺼내도록 유도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많은 직업들이 개항과 근대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소멸된 것과는 달리 전기수는 비교적 오랜 기간 살아남았다. 물론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영화와 레코드, 라디오 같은 경쟁자들이 등장했지만 전기수는 친근함과 저렴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1960년대까지 시골 장터에서는 구수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전기수들이 있었다고 한다. 영화관에서 관객들에게 영화내용을 설명해주던 변사는 전기수들의 후예라고 할 수 있겠다.

 

글 정명섭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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