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사랑
- 제목
- 얘들아, 신명나게 한 판 놀아볼까! 아동극에 우리네 흥과 혼을 담다
- 작성일
- 2015-02-11
- 작성자
- 국가유산청
- 조회수
- 3576
평택, 그이중적문화
평택의 평야는 논농사가 제격이었다. 너른 논에서 봄에는 일렬로 늘어선 모내기 인부들의 노동요가 흘러나오고 가을이면 황금빛 볏단에 절로 흥이 돋는 곳이었다. 모두들 땅의 정직함에 머리 숙여 살았다. 그리고 평택의 또 하나의 얼굴은 미군부대와 기지촌이었다. 듣도 보도 못한 피자와 햄버거가 있고, 외국인 전용 클럽에는 흑인과 백인이 넘쳐 나고, 양공주와 영어 간판들이 밤새 반짝거리는 곳. 소녀 남인우는 그런 곳에서 자랐다. 아침엔 굿을 보고 저녁엔 치즈가 들어있는 햄버거를 질겅이며그녀는무슨생각을했을까?“ 저는 이중적인 문화에 살았어요. 집을 둘러싼 환경은 농촌이고 15분 정도 가면 미군 기지가 있었거든요. 그게 저를 비롯한 저희 세대가 가진 문화적 정체성 같아요. 그게 해결이 안돼서 청소년기에 방황을 좀 했지요. 그런데 대학 가서도 풀리지 않았어요.”대학을 들어가 연극을 전공하였지만 방황은 끝나지 않았다. 괴테도 배우고 셰익스피어도 배웠지만 그녀에게 진한 울림을 주지 못했다. 스트린드베리의‘꿈의 연극’을 대하면서도 그녀의 머릿속에는‘환타지는 굿판인데’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한국인의 DNA, 그녀를 꽃피우다
그 기나긴 방황을 끝낸 것은 대학교 4학년 여름방학이었다. “풍물패를 따라 임실에 가서 풍물을 배웠는데 재미나더라고요. 어릴 때 동네 노인들이 막걸리 한 잔 걸치고 논바닥에 앉아 대충 두들기고 노시는 것만 봤는데 그때 해보니 신명이 뭔지 알겠더라구요” 그녀는 그렇게 어릴 적 자신을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서낭당 나무에서 동무들과 뛰놀았던, 엿장수 아저씨의 노래를 따라 불렀던, 농주를 한잔 걸치고 진짜 판에서 목청껏 뽑아대는 진짜 판소리를 듣고 자란 소녀의 기억이 다시 현재와 연결되어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그곳에서 그녀의 어머니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가 자신의 몸 깊숙이 DNA에 물려준 한국의 장단과 한국의 흥을 찾기 시작했다. 한국 사람이 탱고를 아무리 배워도 아르헨티나 거리의 무용수가 가진 느낌을 다 표현할 수 없듯이, 한국인만이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고유한 정서가 있다. 그 정서는 자신도 모르는 곳에 내재되어 있다가 어느 순간 불쑥 발현되기도 한다. 그녀 또한 그랬다. 풍물을 하자 주체할 수 없이 자연스러운 한국의 흥과 신명이 흘러나왔다.
얘들아! 우리 한 판 놀아보자!
그 다음부터는 우연을 가장한 필연의 연속이었다. 제주도 설화 ‘삼공본풀이’ 를 소재로 한 아동극 <가문장 아기>를 기획하고 있을 때 였다. 극단의 친구와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 친구가 해금을 전공한 친구였다. “옆에서 해금 연주나 해볼래?” 하며 장난같이 시작했다. 북도 넣어보고 장구도 넣어봤다. 하나가 보이자 다른 것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고성 오광대탈춤을 보러 갔는데 춤사위가 너무 연극적이었다. 그래서 그것도 합해 보았다. 모두 다른 것들이지만 하나에 넣어보니 하나가 되었다. 직관적 선택이었지만 그건 어쩌면 조상에게 물려받은, 한국사람 누구나 갖고 있는 능력일지도 몰랐다. 한국적인 것을 달리 공부를 해서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영감은 자신이 딛고 있는 땅에서 시작했다. 그저 ‘뭔가 하면 재미있겠다’ 하는 생각들이 하나씩 그녀의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판소리의 새로운 시도, 사천가와 억척가
젊은 소리꾼 이자람과 함께 만든 <사천가>와 <억척가>도 그랬다. 당시 남인우는 어릴 적 자신처럼 방황하는 한국의 청소년들이 마음에 걸렸다. 희망을 잃고 부유하는 아이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줄까 고민했다. 남인우가 택한 것은 밝고 아름다운 미래가 아니었다. 현실은 암울하지만 그것을 직시하고 당당히 앞으로 나가는 주체적인 삶이기를 바랐다. 자연스레 브레히트의‘사천의 선인’이 생각났다. 이자람과 의기투합하여 ‘사천의 선인’ 을 모티브로 한 ‘사천가’ 를 만들었다. 판소리는 음악적 기교가 중심이 아닌,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는 가가 중요하다는 기본적인 해석에 동의하자 둘은 곧바로 대본작업에 들어갔다. 함께 생각한 것을 소리꾼인 이자람이 판소리적인 어법으로 바꾸어 대본을 만들었다. 어느새 배경은 중국에서 한국의 사천시로, 셴테는 뚱뚱하고 착한 순덕으로 변해있었다. 그렇게 나온 대본에 연출의 해석을 입히고 이자람은 다시 배우의 눈으로 새로운 것을 보탰다. 판소리 장단에 서양 악기도 들어오고 새소리도 들어왔다. 작품이 관객과 만나는 시간, 작품은 처음 의도보다 더욱 풍성해져 있었다. 연일 매진을 기록했다.
전통 속에 새로움, 세계를 사로잡다
그런 공연을 해외도 알아보기 시작했다. 올해로 열 살이 된 어린이 연극 <가문장 아기>는 이미 세계 12개국에 초청되었고 ‘사천가’ 와 ‘억척가’ 는 아비뇽페스티벌 등 각종 무대에서 기립박수를 받으며 세계 여러 나라로 초청되었다. 전통은 그녀의 작품 안에서 다시 현대와 세계로 이어지고 있었다.“ 서양 것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우리 것을 철저히 배제하고 받아들였잖아요. 하루아침에 우리의 몸속에 흐르던 문화적 정서가 훼손되고 잊혀져버렸어요. 마치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설움처럼 우리의 것을 우리 것으로 말하지 못했잖아요. 이런 설움이 있었던 것 같아요. 서양의 고전은 자신의 모습대로 주물러서 가는데 우리는 너무 우리의 전통을 지켜야한다는 강박이 있는것 같아요. 저는 현대와 과거가 함께 공존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보려구요.”
이제 그녀는 자신의 기억과 방황들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안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자신이 힘들게 되찾았던 자신의 정체성을 우리 아이들에게 알려야한다는 책임감을 느낀다. “요즘의 전통예술은 마치 그 부분의 교육을 받고 양산된 사람들만이 하는 특수한 분야라고 생각해요. 전통 예술은 우리 삶 속에 있었잖아요. 전통 예술을 향유하는 기회를 아이들에게 주고 싶어요. 아이들의 유전자에 우리의 정서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어야지요.” 고민을 끝낸 자의 여유가 묻어나는 웃음이 그녀의 얼굴에 가득했다.
글 김새별 사진 김병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