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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사랑

제목
백제문화의 포용의 정신과 백제 금동대향로의 창조성
작성일
2015-02-11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9806

흔히 백제는 삼국시대에 한반도의 서남부, 충청도와 전라도를 지배했던 정권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들의 지배층은 북쪽 고구려에서 내려온 사람들이다. 만주와 유라시아의 기상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고구려에 막혀 북으로 진출하는 것이 어려워지자 그들은 초원을 달리던 말을 바다 위를 달리는 배로 바꿔 타고 바다를 개척했다. 필리핀을 지배했던 흑치상지 집안의 내력이라든지, 일본 쪽의 자료를 살피면 백제는 중국남부와 동남아시아 일대, 그리고 일본을 지배하고 경영했던 큰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인의 정신과 문화를 상징하는 유물

지금은 백제인의 문화와 정신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것이 쉽지 않지만, 다행히 그들이 남긴 백제금동대향로는 그들의 정신과 문화, 그리고 기상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엿볼 수있는 대표적인 유물로 남아있다. 이 향로는 무엇보다 그 상징 하나하나가 고대 동북아인들의 정신과 문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꼭대기에 장식된 봉황에서부터 그 밑의 5악사와 5기러기, 그리고 산악수렵도와 아래쪽의 연화도, 그리고 맨 밑의 용에 이르기까지 모두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선, 향로에는 정상에 장식된 봉황을 중심으로 그 둘레에 5악사와 5기러기의 상징체계를 이루고 있는데, 이것들은 고구려와 백제 등의‘5부체제’를 나타내는 상징물이다. 5부체제란 백제의 수도와 지방을 5부로 나누는 정치체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향로에서 5악사는 5부의 귀족들을, 5기러기는 5부의 백성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봉황은 5부체제의 중심에 있는 백제의 왕을 나타낸다. 향로문화가 발달한 중국이나 중동지역 어디에서도 이와 같은 상징물을 본 적이 없다. 그 자체가 대단히 창조적일 뿐 아니라 그들의 정치 지향성을 분명하게 드러낸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백제금동대향로는 향로의 본체를 고대 동북아의 전통적인 세계관인 삼계관三界觀에 따라 천상계와 수중계로 나누고, 지상계는 천상계와 수중계 사이에 장식된‘흐르는 구름문양’의 테두리로 표시되어 있다. 천상계 영역은 향로의 위쪽에 있는 산악수렵도의 형태로 꾸몄다. 이러한 공간구분 방식은 고구려고분벽화의 공간구분방식과 동일한 것이어서백제인이 동북아인들의 삼계관을 백제금동대향로에 그대로 묘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01.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 백제인의 정신과 문화, 기상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유물로, 꼭대기에 장식된 봉황에서부터 그 밑의 5악사와 5기러기, 그리고 산악수렵도와 아래쪽의 연화도, 그리고 맨 밑의 용에 이르기까지 모두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문화재청 02.앗시리아 부조에 나타난 삼산형 산악도(좌)와 백제의 산수봉황문전의 삼산형 산악도(우). 삼산형 산악도는 앗시리아에서 처음 출현해서 사산조로 전파되었고, 다시 동아시아에 전해졌다. ⓒ서정록 03. 백제 동탁은잔(무령왕릉 출토). 향로 본체가 산악도와 연화도로 이루어진 백제금동대향로의 원형을 그대로 갖고 있다. 백제금동대향로를 만든 이들은 이 동탁은잔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서정록

산악도에 담긴 열린 시각

향로가 중동에서 동아시아에 전해질 때는 향로의 윗부분에는 중동의 산악도나 계단식 피라미드 형태의 산들이 표현되어 있었다. 한대의 향로에 자주 나타나는 흉노족들의 산악도나 신선들이 사는 봉래산 같은 산들은 향로의 산악도를 자기 문화에 맞게 바꾼 것이다. 그렇지만 향로문화는 흉노의 문화가 쇠퇴하면서 점차 쇠퇴한다. 그 뒤 북방인들이 다시 중국을 지배하는 남북조시대에 향로문화가 꽃을 핀다. 황하 이북을 차지한 선비족 북위는 한족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불교를 국교로 삼았다. 그리고 부처에게 공양하기 위해 서역에서 향로를 들여왔다. 하지만 그들이 만든 향로의 산악도는 주로 불교의 수미산 형태로 되어 있다.

6세기 전반, 백제인이 백제금동대향로를 만들 당시 중국은 북위시대였고, 그런 만큼 백제금동대향로는 북위 향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백제인은 북위 향로의 양식을 가져오면서도 산악도에 불교의 수미산 대신 고구려고분벽화의 천상계에 묘사된 것과 같은 산악수렵도를 가져왔다. 고향을 떠나 이방에서 사는 백제인으로서는 불교의 수미산보다 그들의 정신적 뿌리가 담긴 북방의 산악수렵도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산악수렵도에는 죽은 뒤 천상계에 사는 조상들의 여러 모습과 함께 성수聖獸, 저승의 문 등이 장식되어 있다. 또 산악도는 백제인의 정신적 세계를 잘 드러내면서도 중동의 앗시리아나 사산조 페르시아의 예술에 등장하는‘삼산형三山形’산악을 채택하고 있는데, 이것은 백제인이 국제적으로 열린 시각을 갖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문화는 창조한 사람보다는 그 문화를 이해하고 자기 것으로 만든 사람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백제인은 이 점을 잘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안으로는 자기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외국문화를 폭넓게 수용하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런 열린 태도는 그들이 바다로 나가 식민지를 개척했던 형태로, 수중계는 그 밑에 연화도蓮花圖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요즈음 우리나라 사람들은 외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는데 정신이 팔려 우리 문화를 폄하하거나 외면하는 일이 잦은데, 그들은 우리 문화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03. 백제 동탁은잔(무령왕릉 출토). 향로 본체가 산악도와 연화도로 이루어진 백제금동대향로의 원형을 그대로 갖고 있다. 백제금동대향로를 만든 이들은 이 동탁은잔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서정록 04. 고구려 덕흥리 고분 천상계 산악수렵도. 백제금동대향로는 북위 향로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산악도에 불교의 수미산 대신 고구려고분벽화의 천상계에 묘사된 것과 같은 산악수렵도를 가져왔다. ⓒ서정록

 

연화도에 반영된 고구려고분벽화 내용

산악도 아래쪽에는 흐르는 구름문양의 테두리(차원을 나누는 경계 역할을 한다)가 있고, 그 밑으로 연화도가 장식되어 있다. 연화도는 우리 민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주제로 연꽃과 잉어 등을 그린 것으로 가정과 사회의 안녕과 화목을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동시대 중국의 향로가 대부분 불교의 공양구로 사용되었고, 향로에도 불교의 연꽃이 장식되었던 것에 반해, 백제인은 백성들의 안녕과 평화와 안녕을 비는 연화도를 장식한 것이다.

연화도 아래에는 향로를 입에 물고 하늘로 비상하는 용이 장식되어있다. 이 용은 향로를 바다에서 천상으로 떠올리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향로 본체의 산악수렵도와 연화도가 백제인의 정신세계를 나타낸 것이라고 볼 때, 백제가 곧 우주의 중심임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대륙 대신 바다로 진출했던 점을 고려하여 향로에 바다를 상징하는 용을 장식한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중요한 점은 그 상징들이 고구려고분벽화의 내용들과 상당부분 겹친다는 사실이다. 산악도에 장식된 수렵도가 고구려 덕흥리고분의 천상계에 장식된 산악수렵도의 내용과 일치하는것, 또 고구려고분벽화의 도리 위에 자주 등장하는 박산문양이 백제금동대향로에서도 산악수렵도와 연화도 중간에 있는 테두리 위에 똑같이 표현된 것, 고구려고분벽화의 천상계에 장식된 인물상들과 거의 동일한 인물상들이 산악도 곳곳에 장식된 것, 또 산악도 밑에 연꽃을 입에 물고 비상하는 용의 모습이 고구려고분벽화에서도 똑같이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은 고구려고분벽화에 들어있는 중요한 내용들이 백제금동대향로에 똑같이 표현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백제금동대향로는 고구려고분벽화와 함께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문화를 대표하는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백제금동대향로는 530년경 백제의 성왕이 공주에서 사비성(부소산성)으로 천도하면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왕은 이 향로를 신궁神宮과 사찰寺刹의 양식이 함께 존재하는 신궁사神宮寺에 안치했다. 신궁은 왕실의 신들과 조상들의 영들을 모신 곳이고, 사찰은 부처님을 모시기 위한 곳이지만, 불교가 처음 이 땅에 전래될때는 신궁과 불교가 양립하고 공존하는 형태였으므로, 이와 같은 신궁사를 만들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신궁사의 흔적은 고구려에서도 보이고, 동시대에 일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백제인은 당시 중국에서 불교의 공양구로 사용되었던 향로에 자신들의 정체성과 관련된 전통양식을 장식하였고, 그것을 신궁과 사찰이 결합된 백제의 신궁사에 모셨던 것이다.

이상의 여러 점들을 돌아볼 때, 백제금동대향로는 자기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불교가 주는 큰 가르침을 수용하고자 한 포용과 조화의 정신을 대표하는 백제 최고의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는 나무와 같다. 나무는 아무리 가지가 크게 번성해도 뿌리가 튼튼하지 못하면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뿌리 깊은 나무, 샘이 깊은 물이 중요한 것이다. 자신들의 고향인 만주를 떠나 한강과 그 이남 지역에 자리를 잡았던 백제인은 이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상은 너무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 못지않게 우리 문화의 뿌리를 보존하고 지키는데 더욱 더 정성을 쏟아야 할 것이다

05. 부여 부소산성(사적 제5호). 백제금동대향로는 530년경 백제의 성왕이 공주에서 부소산성으로 천도하면서 제작한 것이다. ⓒ문화재청

 

글 서정록 (역사학자, 트렌스워킹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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