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사랑
- 제목
- 실학의 시대정신과 포용논리
- 작성일
- 2015-02-11
- 작성자
- 국가유산청
- 조회수
- 6745
사유의 두 갈래
한국사상사에서 보면 삼국시대에 유교·불교·도교의 조화를 제시하던 것이 포용논리라면, 조선시대 도학(道學, 주자학)이 불교와 도교 등 모든 다른 사상을 이단으로 규정하여 배척하였던 것은 폐쇄적인 정통논리요, 조선 후기에 활발하게 일어난 실학은 도학에서 소홀히 하던 현실의 문제나 새로운 지식에 관심을 기울이고 적극적으로 찾아 나섰던 것은 포용논리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정통논리나 포용논리 가운데 어느 한쪽이 옳고 다른 쪽은 그릇된 것이라 판단한다면, 그것은 성급하고 잘못된 단정이 될 위험성이 높다. 시대의 조건이나 현실의 상황에 따라 정통논리를 요구할 때가 있고, 포용논리를 요구할 때가 있다. 문제는 시대와 상황이 정통논리를 요구하는데 포용논리를 내세워 혼란을 일으키거나, 포용논리를 요구하는데 정통논리에 집착해 변화의 통로를 막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가 제각기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면서 시대의 요구나 현실의 상황을 외면할 때 어느 쪽도 과오에 빠질 위험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렇게 보면 조선시대 전반기는 명나라의 압박과 여진족이나 왜구의 노략질과 침략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안으로 사회통합을 강화하기 위해 정통논리가 요구되었던 시대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조선시대 후반기는 사회내부의 모순이 누적되어 개혁이 당면과제로 제기되고 서양의 과학기술과 종교문화가 전파되는 변동의 국면으로, 개방의 요구가 대두되는 상황에서 포용논리가 요구되었던 시대라 할 수 있다.
실학의 시대정신
조선 후기 실학은 그 시대가 지닌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관심이요 대응하는 방법과 논리였다. 바로 이 점에서 실학은 시대정신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조선 전기의 도학은 안으로 보면 인간의 내면적 도덕성을 계발함으로써 사회질서를 확립하려는 ‘근본중시’ 의 사유방법이었고, 밖으로 보면 명나라의 그늘 아래 안정을 확보할 수 있는 폐쇄된 세계관 속에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쳐갔던 ‘닫힌’ 사유방법이었다. 이에 비해 조선 후기의 실학은 안으로는 민생을 빈곤에서 구출하고 불합리한 사회제도를 개혁함으로써 효율적 사회를 실현하려는 ‘현실우선’ 의 사유방법이었고, 밖으로는 서양이라는 새로운 지역의 문물이 전파되면서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천하가 허물어지고,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지구地球라는 새로운 천하로 세계관이확장됨에 따라 일어났던‘포용’의 사유방법이었다.
먼저 도학에서 내면의 도덕을 확립하는 것은 ‘근본’ 의 문제라면, 실학에서 사회적 현실의 모순을 개혁하려는 것은‘말단’의 문제로 대비된다. ‘근본’ 을 중시하다보면 ‘말단’ 이 소홀해질 위험이 따르고,‘말단’을 우선시 하다보면 ‘근본’ 이 소원해질수있는 위험이 따르는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의 상황은 ‘근본’ 을 먼저 세워야 할 때가 있고, ‘말단’ 을 시급하게 처리해야 할 때가있는데, 실학은 바로 ‘말단’ 의 현실문제가 시급한 시대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논리이다.
조선 후기 실학은 바로 당대의 당면과제는 극심한 빈곤에 빠진 민생을 구출하는 것이요, 불합리하고 비능률적인 사회제도를 개혁하는 현실문제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봄으로써 시대정신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자신을 다스린(修身) 다음에 가정을 다스리고(齊家), 가정을 다스린 다음에 나라를 다스린다(治國)는 도덕의 근본에서 사회현실의 ‘말단’으로 나아가는 도학의‘근본중시’방법이 아니라, 나라가 다스려져야 가정도 다스려지고 자신도 다스려진다는 사회현실의 ‘말단’ 에서 ‘근본’ 으로 나아가는 ‘말단우선’ 의 방법을 취하고 있다. 실학자들은 관료의 착취를 막기 위해 현실의 제도개혁을 추구했으며, 조선 후기라는 시대의 과제가 개혁에 있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또한 생산을 증가시키기 위해 생산기술의 향상을 추구하고, 이를 위해 청나라와 서양문물에서 새로운 생산기술을 도입하였다. 당시 도학자들은 정통의 명분에 사로잡혀 청나라를 오랑캐라 배척하는 배청론排淸論을 내세우고, 서양 종교를 이단으로 배척할 뿐만 아니라 서양 과학기술도 오랑캐의 간교한 술법이라 거부하는 척사론斥邪論을 주창하는 등 폐쇄된 이념에 빠져있었다. 이와 달리 실학자들은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적극적으로 배워야 한다는 북학론北學論을 내세웠을뿐만 아니라, 서양의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개방정신을밝혔다. 이러한 개방정신 내지 포용론이 바로 실학의 시대정신이라 할 수 있다.
포용논리의 발현
실학의 포용논리는 가장 먼저 도덕의 ‘근본’ 적 문제에서 벗어난 ‘말단’ 의잡다한 지식에 관심을 열어갔다. 이러한 포용논리는 ‘박학博學’ 내지 ‘백과전서적 학풍’ 이라 일컬어진다. 이수광(李光, 1563~1628)의『지봉유설』이나 이익(李瀷, 1681~1763)의『성호사설』과 안정복(安鼎福, 1721~1791)의『잡동산이雜同散異』등의 저술은 모든 문제에 대한 개방된 관심과 포용정신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모든 문제에 객관적 이해를 추구하면, 도학이 정통으로 내세우는 것도 더 이상 유일한 진리가 아니라, 많은 견해나 지식 가운데 하나로 상대화 된다. 도학은 주자의 경전해석을 정통으로 삼고 어떤 다른 해석도 정통을 어지럽히는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 공격하였다. 그러나 실학은 주자의 경전해석에 얽매이지 않고 증거를 찾아 고증하는 방법이나 합리적 논리에 따라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의『사변록思辨錄』, 윤휴(尹, 1617~1680)의『독서기讀書記』, 이익(李瀷, 1681~176])의『질서』,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경집經集』등은 실학의 개방적 포용정신을 잘 발휘하고 있는 실학의 경전해석이다.
실학은 효용성이 있으면 오랑캐의 기술이라도 배우고 받아들이려는 열린 자세의 포용정신을 발휘한다. 이익은 서양의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으며, 박지원(朴趾源, 1737~1805)과 박제가(朴齊家, 1750~1805) 등은 청나라의 벽돌 굽는 법과 수레제도를 비롯한 실용적 기술의 도입을 강조하였고, 정약용은 서양의 기중기起重機제조법을 이용하여 수원성水原城을 쌓는데 직접 활용하기도 하였던 것도 실학의 포용정신을 가장 잘 발휘한 경우라 볼 수 있다.
백성과 나라를 위해 유익하다면 어떤 지식과 기술도 받아들이고 어떤 제도도 받아들여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 실학의 현실인식이요 포용정신이다.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의『반계수록』은 토지제도의 개혁을 올바른 정치의 출발점으로 인식하여 개혁방안을 제시하였고, 정약용은 목민관牧民官이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확인하고, 임금에 이르기까지 모든 통치자는 백성의 추대를 받아 존립하는 것이 올바른 법도이며, 부당한 통치자는 백성이 끌어내릴 수 있다는 백성의권리까지 주장하였다. 또한 노예제도를 폐지하여 평등한 사회로 개혁해야 한다는 이상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제도개혁의 방법도 지배계급 중심의 논리에서 모든 백성을 전면에 끌어올리는 포용의 논리를 밝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실학은 도학의 근본중시 아래에서 외면당했던 다양한 현실적 문제들을 폭넓게 포용하는 ‘박학博學’ 의 학풍이요, 도학의 정통이념에서 배척되었던 다양한 사상조류를 폭넓게 포용하는 ‘개방’ 의 논리며, 도학의 권위적 질서 아래 억눌렸던 백성과 민생을 위해 폭넓게 제도개혁을 추구하는 ‘현실’ 에 대한 관심이었다. 이에 따라 실학에서 국가경영의 방법을 제시하는 경세론經世論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우리 역사·지리와 풍속·언어를 연구하는 국학國學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던 것도 실학의 시대정신으로서 ‘포용’ 의 논리가 열어주었던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재판 결과가 억울할 경우 지금의 도지사에 해당하는 관찰사에 게 재심을 청구할 수 있었고, 이어서 중앙 관청에까지 항소할 수 있 었다. 그마저도 안되면 신문고申聞鼓를 치거나, 상언上言·격쟁擊錚의 방식으로 국왕에게 직접 호소하는 길도 있었다. 이처럼 조선의 소송 및 소원제도에는 백성들의 민원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해결 의지 가 담겨 있었다. 중세적 민본의식이 근대적 민권의식으로 조금씩 진 화해가고 있었다.
글 금장태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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